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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유산: 개성의 역사유적, 2부 중 1부

2022-03-12
진행 언어: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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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라는 이름은 918년 한반도를 통일하고 1392년까지 통치한 고려 왕조에서 유래했습니다. 고려의 도읍지는 개성으로 이곳은 고려왕조의 시조인 왕건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서울과 직선거리로 58㎞ 떨어진 이 도시는 한 왕조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리며 오백 년 동안 한국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무역과 상업도시로도 천 년간 이름을 떨쳤습니다. 수도인 개성은 약 십만 가구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로, 삼백 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고 전체 고려 인구의 삼분의 일이 출가승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많은 귀족과 왕자들도 승려로 출가했습니다. 또한 크게 존경받는 덕 높고 깨달은 고승을 『국사』로 칭하고 왕의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개성의 시민들과 왕실에서 출가승에게 식사를 공양하는 반승 행사도 자주 거행했습니다. 왕실의 반승 행사에 참석한 승려의 수는 만 명 단위가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자비로운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고려의 왕들은 여러 번에 걸쳐 소 도축 금지령을 내렸고 금령을 어겼을 때는 살인죄와 같은 처벌을 내려 도축을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고려 시대엔 식물성 식단이 높이 발달했고 계속 발전했습니다. 또한 고려 시대에 제사를 지낼 때 어육류를 올리지 않고 밀가루를 튀긴 과자를 대신 올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의 역사적 가치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완전한 불교 교리 문서 중 하나』로 기술되었습니다. 백운화상이 지은 직지심경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고려 왕조에 대해 기록된 가장 핵심적인 역사서는 『고려사』입니다. 이 책은 채식인이었던 세종대왕의 재위 기간 중 편찬되었습니다. 고려 시대에 개성은 국제무역도시로서 아랍, 페르시아, 인도, 태국, 어울락으로도 알려진 베트남, 중국의 송나라 등과 교역했습니다. 무역과 금융에서 개성이 지닌 오랜 역사적 명성은 2003년 개성공단의 결실로 이루어졌습니다. 개성공업지구는 한반도의 남과 북의 협력으로 건설되었습니다. 공단에는 남측 기업이 입주해 2016년까지 섬유, 의복, 기계 등의 분야에서 개성의 주민들을 고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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