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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 길동무로 살아가기 - 조지 버나드 쇼(채식인): 예술 교육, 2부 중 1부

2021-08-18
진행 언어: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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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는 1856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에 이미 음악과 연극에 대한 문학 비평을 집필했습니다. 쇼는 몇 권의 소설을 저술한 후 희곡과 수필로 분야를 바꿨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는 50여 편의 희곡을 쓰며 문학계와 정치계에서 당당한 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회 개혁에 헌신하는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의 영향력 있는 작가였습니다.

1925년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나중에 피그말리온을 각색한 시나리오로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은 시사하는 바가 컸으며, 모두의 더 큰 정의를 위해 사회 규범에 대한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그가 언젠가 말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유를 말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꿈꾸고 왜 안 되느냐고 묻는다』

쇼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도 적용해 육식이 동물에 끼치는 고통을 인식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쇼의 고귀한 행동은 2009년에 칭하이 무상사님이 아일랜드 애견잡지와 가진 인터뷰에 드러납니다.

Master: 『사람들은 모릅니다. 동물에 대한 이 모든 잔인한 대우가 아무도 볼 수 없는 창 없는 벽 뒤에서 일어나니까요. 우리는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유명한 아일랜드 극작가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 버나드 쇼가 말했지요. 「내 뱃속을 죽은 동물의 무덤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보다시피 깨어있는 사람은 고기를 건드리지 않죠. 깨어나게 되면 완전히 바뀌는 것처럼요』

오늘은 부모와 자식 간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수필집인 『부모와 자식, 길동무로 살아가기』에서 『예술 교육』을 소개하겠습니다. 백 년 전에 집필한 이 글에서 묘사한 많은 개념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적절합니다.

예술 교육

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이에게 자유로운 그림이나 원근법을 가르치는 것을 뜻하지 않음을 미리 말한다. 나는 단지 미술이 고통 외의 유일한 스승인 것에 주목하길 바란다. 나는 고통의 위협을 겪지 않으면 아무도 교과서를 읽지 못한다고 이미 언급했었다. 교과서란 예술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나 설교자가 예술가가 아닌 수업이나 설교는 들을 수 없다.

문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성경을 읽을 수 없다. 따분한 책을 읽는 것, 지루한 연극이나 진부한 설교나 강의를 듣고, 재미없는 그림이나 추한 건물을 응시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오직 병이 있을 뿐이다. 이런 것은 우리 영혼에 폭력이 되어 상처를 남기고, 정신병리학자들이 제대로 연구하지 못한 미묘한 질병을 낳는다. 우리는 지루함을 참는 정말 무서운 힘을 얻는다. 우리는 심지어 미술이 선정적이고 인격을 파괴한다는 관념을 갖는다.

우리가 지루한 허튼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이유는 걷고 말하기 시작한 때부터 지루함이나 헛소리에 감히 화를 내거나 지루하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타고난 성급함과 조롱을 표현하면, 무시당하고 야단맞으며 괴롭힘을 당하며, 매맞고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 세뇌된 경건함의 유대를 끊고, 볼테르나 디킨스처럼 우리의 기만과 잘난 체의 콧대를 폭로하며 비웃고 비틀기에 충분한 순진한 힘을 가진 영혼이 나타나면, 우리는 심지어 웃지 않을 수 없을 때조차 충격을 받고 분개한다.

더 나쁜 것은 진리를 보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핍박하는 것인데, 그들의 진솔함과 통찰력이 우리의 망상과 무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넬 그윈의 하인과 같다. 그가 주먹으로 넬의 평판을 지키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믿는 정직한 여인의 부류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할 만큼 훌륭하지 않은 사람의 하인이라고 경멸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쁜 공연으로 사람들이 기피하게 할 수 없는 예술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 책을 읽거나 피아노의 도움으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 위대한 거장의 실제 작품과 우리 사이에는 오직 거리만 존재한다. 현대 사진 촬영 방식은 때에 따라서는 조용하고, 셰익스피어 연극의 현대판이 처음 그의 필사본에 있던 메시지를 전달하듯이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음악 연주에서 위대한 걸작의 재생은 이미 진행 중이다. 축음기에서 음악 연주를 보내는 온갖 소리는 그 방법이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개선점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불쾌한 소음을 무시할 수 있는 복된 선택적 기능이 있기에, 만일 그 중간에 음악 한 가닥이 있어도 (축음기에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설정한 많은 기계적 소음에 신경 쓰는 비평가는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우리는 적어도 가령 음악이라고는 교회 음악뿐이고, 그 음악도 몇몇 선의의 숙녀들이 풍금과 함께 연주하는 영국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도, 팔레스티나의 미사를 아주 쉽게 들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잭슨이 바장조와 고대와 현대의 찬송가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신의 찬송에서 아름다움과 예절의 마지막 용어는 아마도 아닐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은 모든 사람이 접근할 거대한 예술 영역이 있다. 어려움은 이 예술만이 홀로 육신과 영혼의 은총으로 우리를 교육할 수 있고, 과거 역사를 우리에게 살아있게 하거나 미래의 희망을 우리에게 비출 수 있다. 영감을 주는 수단이자 성자들이 교감할 방법으로 정해진 예술은 사실상 우리 가운데 죄악으로 낙인찍혔는데, 예술이 일어나는 곳마다 폭정에 대한 저항, 속박의 타파, 자유의 숨결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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