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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 고독 속의 명상 - 토마스 머턴 신부(채식인), 2부 중 1부

2021-06-23
진행 언어:English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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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신부는 가톨릭의 중요한 신비가, 영적 사상가로서 1915년 뉴질랜드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 닥친 많은 삶의 환경이 그를 종교와 영성을 탐구하도록 이끌었고, 결국 수사가 되어 삶을 신에게 바쳤으며, 후에 미국 켄터키주 트라피스트 수도회 겟세마네 수도원의 부제가 됩니다. 또한 수도원의 황야 지역 외딴집에서 홀로 지내길 즐겼습니다. 수도사 생활 중에 토머스 머튼은 종교적 글을 번역하고 자서전을 집필하며 작문능력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영성, 사회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주제로 시와 책,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머튼의 가장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 성자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사실상 내가 누구인지,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아주 투명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신은 이것을 통해 항상 빛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멋진 얘기나 우화가 아닌 진실입니다』

모든 종교의 평등함을 믿는 토머스 머튼은 만년에 동양의 전통에 깊은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는 또한 14대 달라이라마와 활발한 담화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미국 켄터키주의 토머스 머튼 센터와 토머스 머튼 국제 협회에서 이 현명한 신부의 삶과 활동을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토머스 머튼의 저서 『고독 속의 명상』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신부님은 겸손과 수도원 생활, 그리고 『하느님처럼 우리에게 말하는』 책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나눕니다.

12장 『만일 영성 생활을 하고 싶다면 삶을 단일화해야 합니다. 삶은 완전히 영적이거나 전혀 영적이 아닙니다.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며, 삶은 당신이 사는 목표에 따라 정해집니다. 당신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집니다. 삶을 단일화하기 위해 하나만을 원하세요. 삶을 영적으로 만들려면 욕망을 영적으로 만드세요. 욕망을 영적으로 만들려면 욕망이 없길 바라세요.

성령 안에 사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원한다면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신을 알기 위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창조를 넘어 안식하는 신 안에서 안식하기 위해 우리는 피조물 안에서 안식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세상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양성을 넘어서서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찾는 사랑의 단순함으로 그것을 재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든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잃은 자는 목숨을 구하리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욥기 28장 (또한 바룩서 3권)은 하느님의 지혜가 숨겨져 있어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지혜이기에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예측하며 끝맺습니다.

수도사는 자신의 소명 밖에서 지혜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밖에서 구하면 절대 지혜를 찾을 수 없는데, 그에게 지혜는 소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그의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 자체입니다. 수도사가 신을 찾는 것은 그의 삶을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두시지 않은 무언가를 자기 삶에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 자체이고, 우리 안에 살면서 주님 자신을 드러냅니다. 생명은 우리가 살아가는 한 자신을 드러냅니다. 수도원 생활은 신의 자비로 가득합니다. 수도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은 명령입니다. 신의 뜻을 행할 때 신의 은총을 받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총의 선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수하고 불가사의한 의도로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께서는 우리에게 이 의도를 은혜로 주시니, 우리는 더 많은 은혜와 더 많은 자비를 얻는 수단으로 삼고 주님을 사랑할 능력을 키우게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는 우리의 수용력이 클수록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힘이 커집니다. 주님은 자신의 선물만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자비가 가장 큰 사랑을 낳은 자들에게 최고의 영광을 받습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장 47절)』

14장 『독서는 진리의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는 행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실체나 더욱 위대한 실체인 주님 자신을 반영하는 말씀에 마음을 엽니다. 독서는 또한 하느님께서 그분의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이들에 대한 겸손과 존경의 행위입니다. 독서에서 더 많은 걸 얻고, 지성의 행위만이 아니라 온 인격의 더욱 심도 있고 활기찬 행위가 될 때, 하느님을 한층 더 많이 찬미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때 사유, 묵상, 기도, 또는 신께 대해 명상하고 심신이 상쾌해집니다.

책은 하느님처럼, 인간처럼, 우리가 사는 도시의 소음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책이 빛과 평화를 주고 우리를 침묵으로 채운다면 책은 하느님처럼 우리에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책을 놓기 원하지 않을 때 책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그 책의 말을 다시 듣기를 원할 때 책은 인간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책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평화도 도움도 기억할 만한 그 무엇도 주지 않으면서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 권태로 포로로 만든다면 책은 도시의 소음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말하는 책은 너무 권위 있게 말하므로 즐겁게 해주지 못합니다. 좋은 사람처럼 말하는 책은 인간적 매력으로 사로잡고, 그 책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 책은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알아봄으로써 자신을 더 잘 알도록 가르쳐 줍니다. 군중의 소음처럼 말하는 책은 오로지 그 공허함의 무게로 우리를 절망에 빠뜨립니다. 그 책은 도시의 밤거리 불빛처럼 채워 줄 수 없는 희망으로 위로합니다. 책들은 위대할 수도 있고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책은 단지 위대한 사람들, 고유의 인간성 이상의 그 무엇을 가진 사람들, 자신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과 사귀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사상과 말이 아니라 진리가 지성의 자양분입니다. 이 진리는 지력만 살찌우는 추상적 진리가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이 추구하는 진리는 실체, 존재, 본질을 모두 합친 온전한 진리, 사랑하고 껴안을 수 있는 그 무엇, 우리의 행위로 경의를 표하고 봉사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어떤 것, 사람들, 또한 개인 이상의 그 무엇입니다. 진리는 무엇보다 존재를 본질로 하는 주님이신 하느님입니다. 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읽을 수 있는 생명의 책입니다』

15장 『겸손은 미덕이며, 겸손은 덕스럽게 행동하고 하느님을 섬기고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참된 겸손은 진실로 덕스러운 행동을 방해할 수 없고,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우리가 자신을 실현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자신의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겉으로만 좋은 것에서 우리 의지를 떼어냄으로 선을 행하도록 해방시키죠.

우리의 존재를 얼게 하고 모든 건전한 행동을 좌절시키는 것은 겸손이 아니고 오만의 위장입니다. 그것은 영적 생활의 뿌리를 말라붙게 하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 당신은 겸손을 사랑하도록 가르쳤지만 우리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것의 껍질, 사람을 매력적이고 또 매혹적으로 보이게 하는 그런 겸손만 사랑하기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고요히 겸손의 속성을 생각하며 자주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척하고, 『겸손을 실천함』으로써 그걸 얻은 것처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겸손하다면 우리가 얼마만큼 거짓말쟁이인지 알겠지요. 나에게 겸손을 참도록 가르쳐 주고 보여주고, 끊임없이 내가 거짓말쟁이고 속이는 자라 해도 진리를 향해 노력하고 진실해야 하는 의무가 나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겸손을 지니게 하소서. 나의 모든 진실이 반은 기만으로 물들어 있음을 결국 알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참담한 점인데, 절대 완전하게 얻지 못합니다. 이 지상에서 완전히 겸손해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죠. 주님, 당신은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겸손은 바로 오만함이며, 그 오만에 대해 잘 알고, 그 오만의 참을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리면서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압니다.

당신의 자비는 어찌 그리 엄격한지요. 당신의 진리는 참되어야 하므로 공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엄격하든지 당신 자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려고 노력할수록 자신의 허위를 더 많이 발견합니다. 당신의 빛이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이 자비입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저를 절망이 아니라 겸손에 이르게 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참된 겸손은 참담한 절망이기 때문이죠. 참된 겸손이란 오로지 주님께 희망을 두기 위해 나 자신에 절망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어둠에 빠지는 걸 견딜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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